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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들이는 일은 신뢰를 얻는 과정이었다. 어제 일어난 사건을 다룬 오늘 자 신문은 소문보다 더 믿을 만했고, 며칠을 기다려 도착한 편지는 진심이었으며, 회신을 급하게 보내는 대신 말 한마디를 고르기 위해 골똘히 생각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배려였다. 느림은 비효율이 아니라, 진심을 보여주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제 느림은 결함으로 읽힌다. 카카오톡의 ‘1’ 표시가 계속 남아있다면 불안해지고, 연인과의 연락이 하루라도 늦으면 신뢰가 흔들리며, 1초 간의 로딩은 하루처럼 느껴진다. 당일배송이 아닌 상품은 불편함으로 간주하고, 배송이 하루라도 지연되면 시스템의 문제로 여긴다. ‘얼마나 빨리 반응하는가’가 ‘얼마나 진심인가’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즉시’, ‘실시간’, ‘최신’과 같은 단어는 편리함의 수식이 아니라 신뢰의 기준이 되었다. 빠른 정보일수록 더 진짜 같고, 더 영향력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예전에는 수많은 사람과 장치의 필터를 거쳐야 눈앞에 도착하던 정보들이, 지금은 실시간으로 손끝에 닿는다. 이제 정보는 품질보다 속도로 평가된다. 저널리즘도 그 흐름을 따라, 무엇이든 빠르게 소비가 가능한 SNS로 옮겨가는 추세이다. 정보의 깊이 대신 반응의 즉각성이 콘텐츠의 핵심 목적이 된다. 생각은 압축되며, 감정은 요약된다. 한 문장 안에 애도와 희망, 감탄과 분노가 모두 담긴다. 한 건의 기사에 담겼을 내용은 한 눈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소분되어 전단지처럼 널리 뿌려진다. 꽝꽝 언 채로 출발한 정보는 어느새 다 녹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썩은 채 도착하기도 한다. 결국 정보의 파편만이 세상에 나뒹굴게 된다. 빨라진 유통 속도는 유효한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시간에 대한 기준도 재촉했다. 관심도의 총량뿐만 아니라, 관심도를 ‘얼마나 빠르게’ 얻느냐도 성패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시간당 조회수, 반응 속도, 체류 시간이 신뢰의 새로운 단위가 되었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거의 날 것의 정보만이 진실이고, ‘누가 먼저 말했는가’가 ‘무엇이 옳은가’를 대신하며, 이전과 이후는 점점 흐릿해진 채 ‘지금’만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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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가치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빨리 전달되는지로 평가되면서, 출처를 확인하거나 사실을 검증하는 과정은 점점 뒷전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시급한 뉴스보다는 궁금한 뉴스, 즉 자신이 바로 클릭하고 반응할 수 있는 뉴스에 먼저 집중한다. 전통적인 매체인 신문은 무게와 크기를 가진 물질이기 때문에 빠르게 퍼져 눈앞에 도달하기까지의 경로에 한계가 있다. 반면 인터넷은 더 빠른 속도를 제공하며, 코로나19를 계기로 비대면 방식의 유용성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인기는 더 치솟았다. 물리적 지리는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데이터의 지리가 대신한다. 시간이 진실의 우위를 대체하면서, 정보는 더 넓은 의미의 공간 감각을 재편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원격근무에도 다리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마트를 구경하는 대신 ‘마켓컬리’ 앱으로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으며, 이사를 위해 발품을 파는 대신 다양한 플랫폼을 이동하며 손품을 판다. 몸은 더 이상 공간을 측정하지 않고, 거리감을 체득하지 않는다. 세상은 점점 2차원이 된다. 비평가 이영준의 저서 『기계산책자』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호리병형 발전 경로라 부른다. “겉에서 보기에는 광대하게 넓은 세계를 열어주는 것 같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목이 좁아져서 세계가 다시 작아지는 식’이다. 이를테면 어디에서든지 검색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검색해서 나오지 않는 사실이나 알고리즘에 따른 추천 탭에 없는 작품과 브랜드는 없는 정보 취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어떤 장치가 가져다주는 편의가 크면 클수록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원하는 정보를 읽기 쉽게 요약해 주는 웹매거진이나, 목적지로 최대한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에게 굳이 문제 삼을 것은 가끔 잘못된 정보를 포함하거나 나의 위치를 한 블록 잘못 잡는 것 정도일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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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세계는 편리함의 속도로만 움직인다. 편리함은 빠른 연결이며, 빠른 연결이 곧 효율이고, 효율이 곧 ‘선’이 된다. 하지만 편리함은 언제나 상상력을 대체한다. 단번에 이해되는 사실을 굳이 곱씹어보지 않는 것처럼 의심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정보를 소비하기보단, 정보를 소비하는 속도를 소비한다. 더 빨리 가기 위해 신체를 포기했고, LCD 모니터 안에서 다시 환생했다.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듯했지만, 내비게이션 없이는 아무 곳도 갈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초능력을 얻은 듯했지만, 아무런 곳에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투명한 액정이 만든 좁은 골목 사이로 밀려드는 사람들 틈에 끼어 움직이는 우리는 그저 다음 골목으로 넘어갈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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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이것이 꼭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 애그노톨로지(agnotology)는 무지라는 의미의 라틴어 agnõsis를 어원으로 하는 용어로, 로버트 프록터(Robert Proctor)가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다. 우연한 실수로 인한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인 전략으로 고안되어 생산된 무지의 존재와 그것의 사회적 효과에 집중한다. 로버트 프록터는 그 일례로 끊임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미국의 담배산업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담배 제조사들은 두 가지방식으로 무지의 생산을 이루어낸다. 그중 한 가지는 ‘담배의 해로움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기’, 다른 한 가지는 ‘담배의 해로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게 만들기’이다. 전자의 경우는 대중에게 유해성을 알리지 않는 방법으로, 후자의 경우는 유해성 판단 과정을 더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더 확실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최종 판단을 계속 유보한다. 공중 보건은 정확한 관련성을 얻기 어려운 영역이다. 인간 질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라거나,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라는 식의 논점 유예는 무지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러한 방식의 무지 생산은 특정 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현대 지식 체계의 구조적 특성 중 하나에 가깝다.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파악하고자 할 때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뉴스, 논문, 유튜브 영상, SNS 게시글들은 상반되기도, 중복되기도, 의도적으로 자극적이기도, 상반되기도 한다. 우리는 ‘가짜 뉴스’를 걸러내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알아야 하고, 이 인프라의 복잡성은 우리를 피로하게 만든다. 결국 정보의 진위를 가리는 감각보단 정보를 더 빠르게 볼 수 있는 리듬만이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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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보는 행위’는 응시를 전제로 했다. 한 대상을 오래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굴했다. 지금의 ‘보는 행위’는 우리에게 선택지를 제공하고, 이를 훑어보게 만든다. 이러한 이행은 ‘더 잘 볼 수 있도록’ 돕는 근육을 길러주기보단, ‘무엇을 보지 않아도 되는가’를 판단하는 습관을 만들어주었다. 이제 볼 가치가 없는 것은 의식적 선택 없이도, 자동으로 배제된다. 화려하지 않은 것, 오래 걸리는 것, 익숙하지 않은 것, 복잡한 구조나 긴 설명은 시야에서 지워진다.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은 존재가 사라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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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인터페이스(UI) 디자인은 보여줄 것을 결정하고, 동시에 보지 않게 할 것을 제거하며 사용자 시선의 흐름을 구성한다. 사용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소화된 선택지 안에서 빠른 결정을 유도한다. 안내사항을 꼼꼼히 읽게 만들기보다는 ‘동의’나 ‘다음’ 버튼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배치한다. 푸시알림은 사용자가 반응할 법한 시간에, 열어볼고 싶어할 내용으로, 무시할 수 없는 그래픽으로 조정된다. 우리가 선택했다고 믿었던 것들도 정해진 틀 안에서 일어난다. 강조된 것은 보고, 축소된 것은 넘어가도록 설계된다. 시야는 넓어진 듯하지만, 노출된 것만을 소비하는 방식에 익숙해진다. 짧게 잘린 시선은 왜 어떤 정보가 보이고 다른 정보는 보이지 않는지 더이상 묻지 못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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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가 작동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 이 체계 안에서 사물은 스스로 낡지 않는다.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공산품의 수명을 단축해 새로운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기술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어떤 형태로든 소비를 촉진할 수 있는 진부화는 모두 포괄한다. 스마트폰의 신모델 출시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제조사는 이전 모델의 호환 부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 결과, 고장 나지 않아도 낡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이 생겨난다. 진부화는 더 이상 물질의 노화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물리적인 영역을 넘어, ‘지금’이 아니면 낡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방식으로 새로움의 속도를 촉진한다. 끊임없이 가속화되는 이 체계는 빛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는 것과 같은 한계에 부딪힌다. 극한에 다다른 모든 것은 단지 변화의 징후를 재현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로딩 애니메이션을 바꿔 속도가 더 빠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바꿔 마치 새로운 기계를 얻은 듯한 감각을 만든다. 모두가 네오필리아에 휩쓸렸다. 네오필리아(neophilia)는 그리스어로 ‘새로움’을 의미하는 ‘neo’와 ‘사랑’을 의미하는 ‘philia’의 합성어로, ‘새로운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말한다. 새로움이 주는 즉각적 쾌락에 눈이 먼 우리는 더 이상 변화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항상 변화하는 상황 자체가 기본적인 정상 작동의 증거로 인식되는 것이다.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지도 앱의 GPS 신호가 함께 움직이고, 스마트 워치의 심박수 그래픽은 박동하며, 마우스 커서가 머무는 순간 영상은 재생되고, 스크롤이 멈추지 않는 한 콘텐츠는 끝없이 이어진다. 멈추지 않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기 위한 연출이 가득하다. 세계는 더 빨리 움직이려 하기보단,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을 연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쓸모없고, 갱신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진부화는 이제 지각의 문제가 되었다. |